“도대체 그런건 왜 한 거냐?” – 입다의 서원에 대한 의문

입다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원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죄없는 딸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부조리가 일어난 이유가 바로 입다의 서원 때문이죠. 서원이 무엇인가요? Bal이라는 분은 서원이 거래와 약속의 조합이라고 규정합니다.((Mieke Bal, Death & Dissymmetry: The Politics of Coherence in the Book of Judges, Chicago Studies in the History of Judaism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43. 원문은 이렇습니다. “As a speech-act, the vow is a combination of trade and promise.”)) 입다의 경우, 거래조건은 야웨께서 암몬과의 전쟁을 이기게 하시는 것이고, 약속은 자기를 맞으러 나오는 첫 대상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서원에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입다가 서원을 한 의도가 뭔가 불문명합니다. 그냥 단순히 ‘이기게 해주시면 번제를 드리겠습니다’라고 서원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한 것 같습니다만, 입다가 꼭 서원을 해야만 했을까하는 질문을 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토리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암몬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옵니다 (4).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영입하러 옵니다 (5-11). 입다는 암몬과 담판을 합니다 (12-28). 그 과정에서 연설의 말미에 입다는 야웨께 기도를 합니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27).” 이에 대하여 암몬은 듣지 않았고 (28), 그러자 29절에서 야웨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고 그는 전쟁에 나가는 길에 그 문제의 서원을 하게 됩니다. 만약에 입다가 서원을 하고 난 다음에 야웨의 영이 입다에게 임했다면 이야기가 훨씬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암몬과의 담판이 잘 되지 않자 입다가 전쟁을 결심하고 야웨께 서원을 하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써 야웨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여 입다에게 이 전쟁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는 식의 설명이 가능하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자연스러운” 순서와는 반대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야웨의 영이 임하고나서 입다의 서원이 이어졌지요.

저는 앞에서 언급한 입다의 기도만으로도 야웨께서 개입하실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암몬과의 문제를 야웨께 호소하는 것으로 승리에 대한 충분한 보장이 된다는 말이지요. ((J. Cheryl Exum, Tragedy and Biblical Narrative: Arrows of the Almighty (Cambridge, Engl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50.)) 입다와 암몬 사이의 담판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입다는 암몬이 빼앗으려고 하는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역사 이야기를 끌어옵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려던 시기에 (암몬이 아닌) 에돔 족속과의 전쟁을 통해서 얻은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에돔과 싸워서 빼앗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이렇게 표현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의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시매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아께서 이같이 아모리 족속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 입다가 야웨께서 그 땅을 주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땅의 영토 전쟁은 야웨의 언약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풀어보겠습니다. 저는 성전(holy war, 히브리어로 Ḥerem)이 야웨-이스라엘 언약, 특히 가나안땅을 이스라엘의 영토로 주시겠다는 약속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입다는 그 땅과 관련된 역사의 얘기를 암몬의 왕에게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야웨께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암몬의 왕에게는 “이거 야웨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거든!”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야웨를 향해서는 “이녀석들때문에 당신이 이 땅을 주심으로써 지켜졌던 언약이 깨지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언약에 호소하는 것은 이 전쟁을 더이상 이스라엘-암몬 전쟁이 아닌 야웨-암몬 전쟁으로 만드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자신의 언약이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야웨의 개입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야웨께 호소하는 것만으로도 승리가 보장되는 상황에서 입다는 다소 쌩뚱맞게 서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성령이 입다에게 임하는 사건은 또다시 이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임을 다시금 확정해주는 분명한 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입다는 마치 하나님께서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듯이 “만약 전쟁을 이기게 하시면, 이러이러한 것을 하겠습니다”라는 조건이 포함된 서원을 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입다가 전쟁의 승패와는 하등 관게없는, 다시 말해 쓸 데 없는, 서원을 했다고 봅니다. ((물론 이 서원에 분명한 의도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글이 길어지고 있는듯 하여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기약해야 할 듯합니다.))

두번째로 생각해볼 문제는, 이 서원이 가능하기는 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이 서원의 희생양은 짐승이 아닌 입다의 딸, 즉 사람이었습니다. 일단 입다의 서원 내용을 문법적으로 살펴보면 사람을 꼭 제물로 바쳐야겠다거나, 또는 사람은 절대로 안된다거나 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אֲשֶׁר יֵצֵא מִדַּלְתֵי, “that will come out from my door,” “나의 (집) 문에서 나오는 첫번째,”

וְהָיָה, לַיהוָה, “He/she/it will belong to Yahweh,” “그/그녀/그것은 야웨께 속한 것으로,”

וְהַעֲלִיתִיהוּ, “I will offer him/her/it,” “나는 그/그녀/그것을 제물로 드리겠습니다.”

이 구절에서 번제물을 지칭하는 모든 단어들이 관계대명사이거나 3인칭 대명사이므로 이 대상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문법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Cf. Phyllis Trible, Texts of Terror: Literary-Feminist Readings of Biblical Narratives, Overtures to Biblical Theology, vol. 13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96. Trible은 이 구절에 쓰인 3인칭 남성단수 대명사가 아무런 문맥이 없이 대상의 종이나 성별을 구별할 문법적인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입다가 의도한 것은 사실 동물의 제사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저는 본문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독자라면 입다의 서원 상황에서는 동물 제사를 떠올렸을 것인데, 갑작스레 등장한 입다의 딸이 이야기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지요. 거기에 더해서 저는 서원자였던 입다 스스로도 어느정도 의도를 가지고 애매한 표현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글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

아무튼 문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의 제사법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가득 담고 있는 서원인 것은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법에서는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동물에 대한 규칙을 꽤나 상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지요. 특정 동물(이를테면, 소, 양, 염소, 비둘기)이 아니면 제사로 드릴수가 없고, 그 중에 흠이 있어도 안되는 등 매우 까다로운 규정이 있습니다. 이를 생각해보면 입다의 서원은 참 위험천만하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자면 Bal이라는 학자는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에 개가 나왔다면?” ((Bal, Death & Dissymmetry, 261.)) 그렇다면 입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개를 제사로 드리려면 제사법을 어겨야 하고, 반대로 제사로 드리기를 포기하면 서원을 어겨야 합니다. 이처럼 입다의 서원에는 기본적으로 문제의 여지가 많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에서 발생합니다. 고대 근동의 다른 문서들을 살펴보면 당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서는 인간제사의 예가 있기는 합니다만, 성경은 인간을 제사로 드리는 것에 대하여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인간 제사를 정죄하고 있으며 (레 18:21; 20:1-5; 신 12:31; 18:10), 혹시나 인간 제사를 드렸던 케이스에 대해서는 혐오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왕하 3:27; 16:3; 17:17; 21:6). ((이 괄호의 내용은 일일이 찾기가 귀찮아서 Exum 선생님이 정리해 놓은걸 번역한겁니다. 원문은, Exum, Tragedy and Biblical Narrative, 45.)) 하나님께서 인간 제사를 싫어하시고 금지하신다면, 인간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받으실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입다가 드린 이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가 없는, 부적절하고 아무런 효과도 없는 제사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유대교 전통의 미드라쉬인데,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딸은, 부정한 짐승과도 같이, 적절하지 않은 제물인데, 이는 그녀가 정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녀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Barbara Miller, Tell It on the Mountain: The Daughter of Jephthah in Judges 11 (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2005), 65. 이분도 여성신학자군요. 입다의 딸에 대해서는 여성신학자들의 관심이 참 각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드라쉬의 경우, 그렇기 때문에 입다가 딸을 번제로 드릴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그 상황에서 입다가 제사장을 찾아가 한 번만 대화를 나눠봤어도 딸이 죽는 사달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저는 입다가 무지해서 딸을 번제로 드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차차 풀어보도록 하지요.))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입다의 서원이라는게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맥을 살펴볼 때 입다가 서원을 했던 의도가 불문명하고 미심쩍은 부분이 다분합니다. 율법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도 이 서원에는 헛점이 많고, 결정적으로 인간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인간 제사를 드리는 입다의 행태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도대체 입다는 왜 그런 서원을 했으며, 왜 딸을 죽이는 식으로 이를 이행해야 했을까요? 미리 말씀드리지면, 저는 “이게 다 입다가 잘못한거다”라는 입장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나눠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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