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비난하는 아버지 – 입다 이야기 두번째

입다 스토리의 비극은 입다의 서원에 의해서 그의 딸이 억울한 번제의 제물이 되어 죽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용맹한 사사였던 입다를 변호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난제가 되고 맙니다. 구약 율법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인간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리도 없고, 그냥 인간적으로만 생각해 보아도 자신의 외동딸을 서원의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죽여버리는 입다의 행동이 쉽사리 정당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입다의 딸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신으로 살게 되었을 뿐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입다의 딸은 정말 죽은 것일까요? 아니면, 독신으로 사는 벌을 받으며 죽은 것으로 간주된 것일까요?

사사기 11:35에 나타나는 입다의 대사를 살펴보면 하나의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입다가 승전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첫 대상은 아시는 것처럼 그의 외동딸이었습니다. 이런 참담한 상황을 보고 입다는, 자기의 옷을 찢습니다. 자신의 딸이 죽을 운명임을 깨달은 아버지가 취할 수 있는 적절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요.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외동딸의 죽음에 직면한 아버지가 극도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니까요. 문제는 입다의 그 다음 행동이지요. 입다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35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입다는 갑자기 딸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딸이 잘못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너때문에 내가 괴롭다.” 이처럼 옷을 찢을 정도의 극도의 슬픔은 자신이 아닌 딸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입다의 스토리를 읽어 보신 분은 아실 겁니다. 입다의 딸이 잘못한 게 있나요? 전쟁에 이기고 돌아온 아버지를 환영하러 나간 것 밖에는 없지 않나요? 입다가 이처럼 자기 딸을 비난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잘못은 자기가 한 것인데, 딸에게 비난을 퍼붓는 모습은 그다지 성숙한 행동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몇몇 학자들은 이러한 입다의 행동을 비난하며, 아버지의 잘못된 서원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택한 딸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게 단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비난이라면, 앞서서 옷을 찢었던 행동과는 뭔가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딸의 죽음을 직면한 아버지가 옷을 찢으면서 슬퍼하고 난 다음에 한다는 소리가 “이게 다 너 때문이다”라면, 그 사람의 정신 상태가 온전한지를 체크해 봐야 할 일이 아닐까요? 저는 이것이 이기적인 아버지가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돌리기 위한 핑계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입다가 딸을 보자마자 거두절미하고 이처럼 파렴치한 말부터 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적어도 사사기 기자의 입장에서는 입다의 이 발언이 중요했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입다의 이 발언이야말로 입다의 딸이 실제로 죽임을 당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Exum이라는 학자는 이처럼 입다가 딸을 비난하는 모습이, 번제물에 자신의 죄를 옮겨가도록 희생물을 저주하는 의식과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J. Cheryl Exum, Fragmented Women: Feminist (Sub)Versions of Biblical Narratives (Sheffield: JSOT Press, 1993), 19.)) 짐승을 가지고 번제를 드릴 때, 제사장이 그 번제물에 안수하고 저주를 함으로써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하고, 그 번제물로 하여금 죄를 지고 죽도록 한다는 개념인데, 입다가 딸을 저주하는 대목이 이 번제물의 저주 의식과 꼭 닮아있다는 말입니다.

즉, 입다의 본심은 딸을 그렇게 저주할 마음이 전혀 없었을지라도, 적어도 상황 자체는 딸을 저주해야 하는 상황이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입다가 가장 먼저 달려나온 딸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가 이 서원의 제물로 확정되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입다는 자신의 본마음과는 상관없이 번제물로서의 딸을 저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입다의 이 발언은 그가 딸을 실제로 번제물로 바쳤다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단지 딸이 독신으로 살도록 강제하는 정도로 이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면, 입다의 비난/저주는 상황에 비해서 너무 과하고 또 부적절합니다.

아마 입다는 훌륭한 용사였을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가져온 대단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딸을 죽였을리는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저는 입다가 딸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살펴본 입다의 대사 역시도 그의 딸이 실제로 번제물이 되어 죽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입다의 딸의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한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입다는 왜 하나님께서는 받지도 않으실 인간 제사를 (그것도 자신의 외동딸을 가지고 드리는 제사를) 드려야만 했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모든게 다 그의 잘못된 서원 때문입니다. 그의 서원이 뭐가 잘못인가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에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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