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에 Gibson 교수님과 설교학을 공부할 때에 교수님께 끊임없이 지적받았던 문제는 이 성경 본문이 회중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즉 Relevance(회중과의 상관성)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설교 개요를 짜서 들고 갈 때마다, 또 설교 원고를 들고 갈 때마다 교수님께서는 저의 설교가 성경의 세계 속에 빠져서 21세기를 사는 회중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역사나 신학을 강의하려고 들지 말고, 현재의 문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니?” 본문을 잘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 설교를 하게 된다는 것과는 매우 다른 문제라는 말입니다.
Relevance는 설교를 준비하는 저에게는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천년전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말씀하시고 역사하셨는데,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것인가?” “그래서 그게 지금 직장을 잃고 힘들어하는 우리 교회의 한 교인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Relevance를 확보한다는 것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접근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설교는 그저 빛깔 좋은 신학 강의나 역사학 강의가 되어버릴뿐, 예배당에 앉아서 설교를 듣고 있는 회중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무능력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Gibson 교수님과의 공부는 예전까지의 저의 설교에 대한 전반적인 틀 자체를 바꾸었습니다. 예전에는 말씀을 읽으면서 단순하게 본문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 내용을 해설하는 것에 주력했다면, 지금은 말씀을 읽고, 그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고 나면 가장 먼저 “이것이 회중들과 무슨 상관인가?”, 또는 “어떻게 이천년 넘은 이 본문을 21세기의 상황과 언어로 풀어낼 것인가?”가 하는 질문들이 제 설교의 주요 이슈들이 되었습니다.
이번 학기에 Arthurs 교수님과의 공부는 이 부분에 대하여 좀 더 명확한 질문을 던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Arthurs 교수님은 설교를 준비하면서 회중들이 던질 질문들을 예상하도록 격려하십니다. 이를테면, 다음의 질문들입니다.
– 이것이 무슨 뜻인가?
– 이것이 정말 참말인가?
–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설교자는 위의 질문들에 대하여 설교를 통하여 답해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도 허락하신다.”라는 메인 아이디어를 잡아냈다면, 이런 질문들을 예상하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내가 지금 겪는 이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 하나님께서 정말 나의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 이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설교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본문에 대한 정확한 석의를 통해 증명하거나, 설명하거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점은 저의 설교를 좀더 ‘내용이 있는 (회중들의 관점에서)’ 설교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또한 Arthurs 교수님은 설교의 전달에 대해서도 매우 강조를 하는 편이십니다. 설교 개요의 명확한 논리, 메인 아이디어의 의도적인 반복(repeat), 같은 의미의 중요 질문들 병치(rephrasing), 정지(pause) 등의 기술들을 통해서 회중들이 설교의 내용에 더욱 집중하고, 설교자의 의도를 좀더 쉽게 파악하며, 설교 이후에도 중요 메시지를 기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분들과의 공부를 통해서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떠한 순서로 설교를 준비해야 할 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나름의 원칙을 정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Robinson 교수님의 책[footnote]주석은 확인되는대로 곧 넣겠습니다. 죄송합니다. ^^;;[/footnote]이나 Sunukjian의 책[footnote]Donald R. Sunukjian, Invitation to Biblical Preaching (Kregel 2007) pp.27-31[/footnote], 또는 스토트의 책[footnote]죄송합니다. 이것도 주석은 나중에…^^;;[/footnote]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설교자가 해야 하는 일은 성경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잇는 다리를 놓는 작업입니다. 이 두 세계의 사이에는 손쉽게 건널 수 없는 커다란 시간과 문화의 간극이 있습니다.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읽어도 쉽사리 감이 오지 않는 성경 시대의 메시지들이 진정으로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을 전제로 한 두 가지 능력이 설교자에게 필요합니다.
먼저는 성경 시대의 언어와 문화, 역사와 문학 등의 성실한 연구를 통한 메시지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석의(exegesis)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이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정확하고 성실한 답을 제시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의 문화를 잘 알지 못했던 저는 한동안 “즐”이라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제 또래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즐공부” “즐컴”처럼 ‘즐겁게 뭔가를 하라’는 뜻으로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즐”이라는 표현은 전혀 다른 의미였습니다. 일종의 비아냥거리는 욕에 가까운 표현이었지요. 이처럼 그들의 문화와 언어, 역사적인 배경 등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같은 말이라도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에 대한 이해도 중요합니다. 개역성경은 롬1:17을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어에는 ‘오직’이 없습니다. 아니, 사실은 있습니다. 그러나 뜻이 다릅니다. 개역성경이 처음 번역되던 당시에 ‘오직’이라는 단어는 ‘오로지’라는 뜻도 있었겠지만 ‘그러나’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로마서 본문이 바로 이 ‘그러나’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입니다. 실제로 원어를 보면 ‘그러나’ 즉 영어의 ‘but’에 해당하는 접속사가 있을 뿐입니다.[footnote]NASB[/footnote] ‘오직 믿음으로만 살라’라는 메시지는 분명히 옳은 메시지이며 은혜로운 말입니다만, 로마서 본문은 우리가 아는 ‘오직’을 의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정리하자면, 롬1:17에는 ‘오직’이 있으나 우리가 아는 ‘오직’은 분명히 아니며, 우리는 이를 읽으면서 오해할만한 소지가 큽니다. 이러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바로 성경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이 설교자의 몫이라는 것이죠.
두번째는 이러한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현대의 회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옛날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단다” 하는 식의 할머니 옛날 얘기가 아닙니다. 성경의 시대를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메시지가 실재였고 삶이었던 것처럼, 현대인에게도 하나님의 메시지는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진리들을 회중들의 귀에 단순하게 나열하는 것으로는 좋은 설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때 한국을 휩쓸고 지나갔던 ‘강해설교’의 열풍은 이러한 실수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혀주고자 한 성경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높이 살만 하지만, 사실상 그분들이 이해하는 강해설교란 그저 성경 각 절의 내용을 주석하여 나열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하여 회중들은 ‘아 그런 뜻이구나’라는 반응 이외에는 할 것이 없었습니다.
설교는 단순한 성경에 대한 주석을 벗어나서 회중들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파고들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설교의 적용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Gibson 교수님, Arthurs 교수님 같은 분들은 relevance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하면, 이천년 전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현실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를 밝혀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석의를 통하여 밝혀낸 본문의 의미를 성경 시대의 문맥으로부터 탈상황화하는 과정과 이를 통해 얻어진 일반적인 진리를 다시 회중의 삶에 비추어 상황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나단 선지자의 입을 통해 다윗에게 전달된 메시지나,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전달될 메시지가, 주일 아침 설교 강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또한 설교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글이나 또는 말로 ‘이래야 한다’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하면 할 수록 쉽지 않은 것이 설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이어주는 놀라운 축복의 통로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