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 대한 두번째 묵상

 

또 하나의 모세 이야기

(광야에 대한 묵상 두번째)

 

 

 

     꿈과 같이 지나가버린 40년. 아니 어쩌면 그 광야 이전의 40년이 꿈처럼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지요.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기대에 찬 시선을 자연스럽게 여기던 모세가 갑자기 변해버린 환경 가운데서 얼마나 고독하고 박탈감에 시달렸을지는 상상해볼 수 있을 겁니다. 깨끗하고 풍요롭고,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던 궁에서 나와 척박하고 외롭고 가난한 광야에 앉아 장인의 양이나 치고 있었던 모세는 아마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 눈물이 말라버리고 오히려 이제는 왕궁의 기억이 꿈처럼 흐려졌을 무렵, 양떼를 치며 외로움을 달래고 아내와 자식을 보며 박탈감을 잊으려 노력할 무렵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 일을 하려무나.”

 

     정말 오랜만에 궁으로 돌아간 모세는 아마 죽은 사람처럼 잊혀진 존재였을 겁니다. 왕자의 당당한 풍채와 자신감 같은 것은 없어지고 그야말로 초라한 옷가지에 지팡이 하나만 들고 서 있는 완전히 달라진 그는 그러나 그 곳에서 40년 전 또 하나의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에는 바로로 나와 있는 파라오, 이 왕은 모세에게는 이미 잊혀져버린 모세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왕자, 그리고 왕으로 평생을 살아온 이 사내는 말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40년 전 많은 것을 가진 자로서 동족을 향한 구원을 어설프게 꿈꾸던 모세에게서 읽을 수 있었던 능력과 자신감, 확신 같은 것들이 자연스레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 파라오는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를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여줘도 파라오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얼마나 고집이 세던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까지도 빼앗아 가셔야 했고 수많은 그의 병사들과 병거들을 홍해에서 죽게까지 하셨습니다. 파라오는 처음부터 자신의 물건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태도로 일관하면서, 한편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일종의 흥정을 하려고 들었습니다. 조건을 걸어서 그것이 만족되는 경우에만 계약을 성사하려는 듯 파라오는 말합니다. “내가 걔들을 왜 보내줘야 하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대상이 잘해봐야 자신과 동등한 협상 대상자 정도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다시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이집트의 왕자로서 40년을 지냈던 모세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생모를 통해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짧게나마 나타나 있는 모세의 행적을 보면 이집트의 왕자이면서도 이스라엘 자손으로서 행동하고 있는 모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족 두 명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며 이를 말리고 나무라는 모세의 모습은 동족이 처한 현실을 보면서 마음아파하며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개탄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집트의 왕자로서 교육받고 자라왔지만 이 사람은 어쩌면 동족 해방의 꿈을 꿔왔었는지도 모릅니다. 뭔가 해볼 만한 나이였을 겁니다.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구요.

 

     자, 조금만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볼까요?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이 40세의 모세를 찾아오셨다고 생각해 봅시다.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유리한 능력과 지위를 가진 이 자신감이 넘치는 젊은이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상상을 해보자는 겁니다. “이 일을 하려무나.” 파라오의 모습을 보면 상상이 좀 쉬워질까요? 아마도 모세는 앞뒤 가리지 않고 덤볐을지도 모릅니다. 혁명을 계획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집트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자손의 새 왕국을 세울 레지스탕스를 조직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모세의 working partner가 되는 겁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흥정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모세가 스스로의 자기 정체성을 생각해볼 때 그는 분명히 자격이 있는 사람 같았고,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셨을 거라 믿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거 정말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을 팔아서 엄청난 실수를 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나요?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우리에게 상상할 자유가 있다면 현실을 바라볼 책임도 있는 것이죠. 이제 80 노인이 되어버린 모세를 생각해볼 차례입니다. 모세는 참으로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일을 계획해 볼만한 젊음을 가진 이가 아니었습니다. 왕자로서의 특권이나 힘도 잃어버리고 자신을 따를만한 충성된 부하들도 없었습니다. 모세는 양을 치고 있었지만 그나마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가진 것을 굳이 생각해보자면 지팡이 하나 정도였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모세는 이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흥정을 할 만한 꺼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만만한 40대를 그저 흘러가버리게 하셨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미 경험했던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대하며 이제는 가진 것 없는 자신의 자격 문제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나요?”

 

     하나님의 광야학교 훈련을 통해서 변화된 모세는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일하려고 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편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80 노인 모세에게 마지막 40년은 그 이전 40년보다 훨씬 괴로운 시간들이었습니다. 훨씬 마음 아픈 일이 많았고,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했던 가나안의 꿈도 접어야 했던 기간이었습니다. 차라리 속편하게 살 수 있었던 이전 40년을 그리워 했을법한 그 험난한 길을 아무런 조건 없이 별다른 문제 제기 없이 나설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조련사이신 하나님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훈련 과정에 있는 사랑하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격려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기대할 훈련의 열매라는 것은 의외로 우리가 애써서 성취하는 종류의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단지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는 일, 주장하려 들기 전에 그분에게 귀를 기울이는 일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보다는 무엇을 버렸는지를 살펴보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주서서 서로를 대하고 있는 모세와 또 하나의 모세였던 파라오를 머릿속으로 그려봅시다. 이제 정리가 좀 되시죠?

 

 

2004.2.20 싸이월드에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