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울 수 있을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성경의 말씀은 백 번 옳은 말이다. 거짓은 사람을 매이게 만든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진리를 소유한 자로서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참으로 진리는 자유의 원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요즘 나는 고민에 빠져서 산다. “색깔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라는 또 하나의 명제가 나를 무척이나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학을 공부하면서 더더욱 크게 느끼게 된 사실은, 많은 신학적 견해들이 말하는 자의 색깔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보수 색채를 띠는 사람은 진보적인 사람들에 대하여, 또 반대로 진보 색채를 띠는 사람은 보수적인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의 색깔을 강하게 주장하려고만 하고 좀처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어중간히 서서 양쪽에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있자면 졸지에 “회색주의자”가 되어버리기 쉬운 형국이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색깔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가 아닌 ‘신학 논쟁의 구조’라는 제목으로 같은 글을 썼도 괜찮을뻔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장로교의 신앙으로 교육되었다. 물론 한국 장로교의 신학적/문화적 특징이라는 것이 정말 ‘장로교적’인가에 대한 별도의 문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일단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의 사상적/신학적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것은 바로 이 장로교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장로교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에 들어와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내가 다니는 학교는 개혁주의자를 양성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교단이 중요하냐를 묻는 사람들에게 간단히 대답해 주겠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교단이 중요해진다. 왜냐. 신학자는 교단의 색깔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처럼 “예수님도 칼빈주의자였다”는 식의 태도는 교단의 색깔이 가진 영향력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내가 우리 학교를 다니고 칼빈주의자, 또는 개혁주의자로 훈련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자리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내가 칼빈주의에 매여버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어떤 이들은 그 안에 있으면서도 충분한 자유를 누린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색깔에 매여있는 사람들은 항상 강박적이다. 과연 그들이 자유로운지에 대해서는 좀더 심각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아직 루터교나, 감리교, 그리고 같은 장로교라도 통합측으로도 나의 자리를 옮길 마음이 별로 없다.[footnote]2009년 현재, 나는 신학 외적인 이유에 의해서 통합측 교단 프로세스를 밟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당시 다니던 학교의 선생님들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footnote] 내가 지금 훈련받고 있는 자리와 나의 선생들의 신학과 신앙도 참 맘에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대신에 색깔을 맹신하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 칼빈이 날 위해 죽고 부활한 적은 없지 않는가.
 
신학은 교회가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도록 건전한 교리와 입장을 제시하고자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신학의 목적은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와 편가르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누군가가 나와 의견이 다르고 또 그 다른 의견이 옳지 않은 의견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그를 향하여 아예 귀를 막아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천국에서도 안 보고 살 것이 아니라면 더이상의 맹목적인 편가르기는 그쳐져야 한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색깔의 노예는 되지 않고 싶다.
 
문제는 이러한 나의 의견 역시 단지 내 색깔을 반영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좀더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되려나…
 
2003.11.1 싸이월드에 작성
2009.9.10 일부 내용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