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라도 하고 죽읍시다!” – 입다의 딸에 대한 어떤 관점

오늘은 입다의 딸의 대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통은 이 대사를 입다의 서원을 지키기 위한 딸의 헌신으로 이해합니다. 사사기 11:36입니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개역개정)

“My father,” she replied, “you have given your word to the LORD. Do to me just as you promised, now that the LORD has avenged you of your enemies, the Ammonites.” (NIV)

Exum이라는 여성신학자는 당시의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로 인해서, 입다가 자신의 서원대로 딸을 죽이려고 할 때, 딸은 이에 대하여 거친 말로 항변을 하거나 반항을 할 수가 없었음을 지적합니다.((J. Cheryl Exum, Fragmented Women: Feminist (Sub)Versions of Biblical Narratives (Sheffield: JSOT Press, 1993). 이 소논문에서는 가부장적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의 여성의 상황에 대한 자세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름없이 순응하고 죽어감으로써 인정을 받는 입다의 딸과, 이름은 나타났지만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망한 케이스인 다윗의 아내 미갈을 비교하면서, 여성신학자로서 본문의 행간을 읽으려는 노력이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할 때 딸의 대사는 여성의 입장에서 다르게 읽어볼 수도 있습니다. 딸의 대사를 유심히 살펴보면 본인이 빠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녀가 아닌 입다가 모든 대사의 중심인물입니다.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연 사람은 딸이 아닌 입다입니다. 자연스럽게 그 입에서 나온 말도 입다의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원수를 갚아 주신 적도 역시 입다의 대적입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닌 아버지의 서원으로 죽음에 내몰린 억울한 딸의 입장에서 이 구절을 바라보면, 딸의 대사는 아버지에 대한 시니컬한 비난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말했나요? 내가 서원했어요? 내 대적이에요? 내 원수예요?”((이 표현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글에 참고할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P.T. Reis, Reading the Lines: A Fresh Look at the Hebrew Bible (Peabody, MA: Hendrickson Publishers, 2002), 124—25. 이분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렇습니다. “You did it. It was your vow, your mouth, your revenge, your enemies.” 이분은 본문을 좀 독특하게 이해하는데, 반항기였던 딸이 입다의 멀쩡했던 서원이 이행되는 것을 망치려고 뛰쳐나갔다는 식의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딸의 대사를 아주 ‘반항적(?)’으로, 그렇지만 분명히 딸의 입장에서, 읽고 있지요. 제 요점은 누구에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는 겁니다.)) 딸의 대사를 통틀어서 자신을 언급하는 구절은 본인이 잘못된 서원의 희생양이 되어 죽게 되는 상황을 묘사하는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라는 대목 뿐입니다. 이 구절도 역시 아버지의 서원을 이루겠다는 착한 딸의 고귀한 헌신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게 된 한 여인의 체념과 냉소가 섞인 빈정거림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지요. “내가 한 서원도 아니고 당신의 서원대로 나를 죽이겠다구요? 에효 (한숨) 그러셔야지요.” 관점에 따라서 딸도 역시 입다를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입다가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것을 보고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 딸에 대한 비난이었으며, 그것은 희생양에게 죄를 전가시키는 일종의 제사 의식적인 요소가 있음을 저번 글에서 언급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에 대한 딸의 반응도 보기에 따라서는 아버지에 대한 비난으로 읽힐 수 있는데, 그 성격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실제로 잘못을 저지른 것은 딸이 아닌 입다이기 때문입니다. 입다는 죄없는 딸을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을지라도 희생제물로서의 그녀를 저주할 수밖에 없었는데, 반대로 딸은 언뜻 보기에는 순종하는 듯한 자세를 보여주지만 아버지의 부당한 잘못을 꼬집으며 비난하고 있는 그림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성신학자는 아니지만 입다의 딸에 대한 그들의 통찰에는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입다의 딸의 대사에 대한 이런 식의 읽기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부녀의 대사를 통해서 사사기의 기자가 보여주는 두 인물에 대한 태도입니다. 주인공인 입다는 자기 잘못은 돌아보지 못하고 딸을 저주하는 못된 아버지로 그려지고 있는데, 반대로 그 딸은 아버지의 부당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순종하고 죽어간 의로운 딸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대화 후에 나타나는 딸의 행적과 죽음, 그녀에 대한 이스라엘의 애도를 꽤나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입다의 황당한 서원 이행과 그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사사기 기자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입다의 딸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 묻어난다랄까요?

사사기 기자는 이 부녀의 대화를 통해서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가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입다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입다가 무엇을, 또 왜 잘못했는지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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