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하고 자식이 지키는 잘못된 서원 – 입다 이야기 첫번 째

이 글을 시작으로 당분간 시간이 날 때마다 입다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려고 합니다. 동진 어느 선배님의 강압적인 요청에 의해서 제가 썼던 페이퍼를 급하게 번역하여 올렸던 이전 포스팅은 아무래도 읽기가 불편할 것 같아서 AS 들어갑니다. 다만, 이번 주부터 학기가 시작하는 관계로, 얼마나 자주 글을 포스팅하게 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전에 올린 길고 정리되지 않은 글은 연재가 완료되면 봉인할 예정입니다. ^^


입다 하면 생각나는 것은 “서원은 해로울지라도 지켜라”[footnote]시편 15: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footnote]라는 무서운 메시지입니다. 어린 시절 부흥회 같은 곳에 가면 흔히 들었던, “서원을 했으면 믿음으로 지키라”는 메시지는 대체로 작정한 헌금을 잘 내야 한다는 식의 물질적인 헌신에 관한 이야기로 치환되기 일쑤였고, 이처럼 서원을 잘 지키는 모범 사례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이 입다 스토리였습니다. 외동딸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음에도 하나님 앞에 한 번 서원한 것은 믿음으로 지켰던 입다를 본받아서 하나님께 헌신을 서원하고 잘 지키자는 식의 메시지였지요. 그리고는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이었던 사람이 전혀 감당할 수 없을 액수의 헌금을 ‘믿음으로’ 작정하고는 결국에는 그 작정한 대로 헌금을 해서 ‘축복을 받았다’는 식의 예화가 뒤따르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입다가 과연 믿음으로 딸을 드린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한 만큼 나중에 다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서원을 지키는 것이 그 사람의 믿음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으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지키기 어려운 서원을 지켜낸 다는 것은 엄청난 결단과 실행 의지를 동반하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이 그 사람의 믿음과 결부되는 것을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는 있습니다만, 문제는 이 서원이 잘못된 것일 때입니다. 저의 은사님이신 송병현 교수님께서 신학을 처음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하셨던 구약 개론 강의의 내용 중에는 입다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요즘도 그런 경우가 있는 경우가 많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는 소위 은혜받은 부모가 자식을 목회자로 서원하고, 자식은 그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 원하지도 않는 신학을 억지로 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입다의 잘못된 서원 때문에 이 서원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딸이 억지로 희생된 것이 이와 비슷하다는 것이었지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입다가 자기를 맞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뛰어나오는 딸을 발견했을 때, 입다는 딸을 제물로 바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했어야 했다는 교수님의 말씀은 제게는 무척이나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물론 저도 부모의 잘못된 서원 때문에 자녀가 희생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입다가 무릎을 꿇고 회개를 했다고 해서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구약을 공부하다 보니, 부모가 잘못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자녀가 큰 희생을 치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입다의 경우에도, 송교수님의 말씀에는 심정적으로 공감하지만, 입다가 딸을 바쳐야만 했던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불합리한 희생이 현대에도 여전히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 봐서도 입다가 결코 잘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입다는 여전히 잘못된 서원을 한 사람이고, 무고하게 딸을 죽였던 나쁜 아버지였습니다. 이어지는 글에서 저는 입다가 했던 서원의 정체가 무엇인지, 입다는 왜 회개하지 않고 딸을 번제로 드려야만 했는지에 대하여 시간을 두고 천천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원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의 헌신의 표현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서원자 자신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나의 헌신을 약속드린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신앙의 행위일 수 있으나, 내가 다른 사람의 헌신을 하나님 앞에 다짐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부흥회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해서 당사자에게는 묻지도 않고 자식을 목회자로 헌신하는 행태만큼은 없어져야 할 것같습니다. 그것은 자녀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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